누구나 쉽게 실험실과 실험도구를 접할 수 있는 ‘바이오랩 서울’ 시민들에 인기
흰 가운을 입고 라텍스 장갑을 낀 후 알코올을 뿌려 소독했다. 무균실험대인 ‘클린벤치(Clean bench)’에서 나오는 바람 소리가 제법 컸다. 헤파필터로 정화한 공기를 팬이 바깥으로 내보내는 소리다. 위에 달린 자외선 조명은 살균을 돕는다. 클린벤치는 외부 오염물질의 유입을 차단하는 생물학 실험실 기본 장비의 하나다.
지난 2월 5일 찾은 ‘바이오랩 서울’에서 생물학 실험의 기초 기술인 ‘스트리킹(Streaking)’을 처음 배웠다.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에 있는 바이오랩 서울은 2018년 8월 문을 연 국내 최초의 공공생물학실험실이다. 누구나 쉽게 생물학을 배우고, 생물학 관련 메이커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스트리킹은 여러 균 중에서 원하는 균만 골라내 새롭게 배양할 때 이용한다. 먼저 클린벤치 안에 놓인 알코올램프에 균을 묻힐 도말봉을 소독해야 한다. 빨갛게 달아오른 도말봉을 식힌 후 기존 배지에서 균을 긁어내 새 배지에 지그재그로 선을 그어준다. 다시 소독한 후 이전 그은 선의 끝부분에서 다시 지그재그로 선을 긋는 과정을 서너 차례 반복해 마지막에 뱀꼬리처럼 죽 그어준다.
버섯 균사체 활용한 토기 제작도
미생물의 농도가 선 긋기를 하는 과정에서 희석되면서 원하는 균만 골라낼 수 있을 정도로 점점이 찍히게 된다. 이론은 그런데 막상 해보니 쉽지 않았다. 중간에 도말봉을 소독하는 과정을 잊고 넘어가거나 선을 겹쳐 그릴 수 있어 주의해야 했다. 허둥대는 기자에게 바이오랩 서울을 운영하는 ‘팹랩서울’의 김동현 이사가 팁을 알려준다. “도말봉은 그림으로 치면 붓 같은 것이죠. 김연아가 아이스링크를 타듯이 정말 부드럽게 힘을 빼고 쓱쓱 그어줘야 합니다. 두 번 정도 하면 잘할 수 있어요.”
스트리킹을 잘하면 미생물로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손에만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색깔의 균들이 사는데, 지문을 찍어 손의 균을 채집한 후 스트리킹으로 색깔별로 균을 분리해 배양하면 이것으로 여러 색의 미생물을 조합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미생물 그림 그리기’ 워크숍이 이런 내용으로 진행된다.
바이오랩 서울에서는 생물학 실험장비를 직접 만들 수도 있다. 값비싼 실험장비와 비교하면 성능은 떨어지지만 집에서도 부담없이 기본적인 생물 실험을 할 정도로 갖출 수 있다. 스티로폼 박스에 헤파필터, 미세먼지 센서와 팬을 조정하는 아두이노(센서와 연산칩 등을 통합한 작은 보드)가 딸린 간단한 클린벤치나 자외선 조명까지 딸린 클린벤치를 각각 4만5000원~25만원 정도면 제작할 수 있다. 액체 혼합물을 분리해주는 원심분리기와 액체에 고체를 섞는 교반기도 만든다.
수백~수천만원 하는 현미경도 성능은 떨어지지만 단돈 8만원 정도에 만들 수 있다. 김동현 이사는 “웹캠의 카메라 렌즈를 거꾸로 배열하면 작은 물체를 확대해 볼 수 있다”며 “잠자리 날개나 꿀벌의 다리를 상세히 볼 수 있는 정도는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김 이사는 “아두이노를 기반으로 해 코딩하는 법도 배우고, 3차원·2차원 모델링을 배워 기계를 이용해 잘라 실험장비를 만들고 그걸 생물학 실험으로 연결한다”며 “애들이 정말 재밌어하고 만족도가 굉장히 높다”고 말했다.
바이오랩은 마이셀리움(Mycelium)을 이용한 소품 제작 워크숍과 콤부차 발효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셀룰로스를 이용한 ‘바이오 가죽’ 제작 워크숍도 열고 있다. 마이셀리움은 잘게 자른 대마 줄기에 버섯 균사를 기른 것으로 매우 가볍고 단단하다. 스티로폼을 대신할 수 있는데 생분해성이라 친환경적이다. 스트리킹 실험을 지도했던 강택수 팹랩서울 매니저는 “마이셀리움을 부딪히면 단단한 캔이 구부러질 정도로 강한데다 불에 잘 타지 않고 물에도 뜨고, 항균 기능으로 흰개미를 방지할 수 있어 건축 소재용으로도 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바이오 가죽은 가축을 기르고, 도축하고 가죽을 화학 처리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동물권 침해와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다. 해외에서는 이미 ‘모던 미도우’ 같은 바이오 가죽 양산 업체가 등장했다. 친환경 신소재에 관심을 갖는 디자이너들도 바이오랩 서울과 협업하고 있다. 마이셀리움을 이용해 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그릇을 제작한 크래프트콤바인의 조준익 디자이너는 “콤부차 가죽이나 마이셀리움 가죽을 활용하는 데 관심이 있다”며 “바이오랩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공공실험이 좀 더 활성화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이디어 실현할 공공실험실 필요”
바이오랩 서울은 2013년 처음 등장한 후 전국에 들불처럼 퍼진 ‘메이커 운동’이 생물학으로 확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차원 프린터의 가격이 떨어지면서 누구나 공개된 제조법(오픈소스)을 활용해 원하는 물건을 직접 제작할 수 있는 메이커 운동이 활발해졌다. 최근 바이오 장비 가격이 하락하면서 이런 ‘DIY(Do it yourself) 문화’가 바이오 분야로도 퍼지고 있다. 외국에선 ‘크리스퍼 카스9(CRISPR-Cas9)’이라는 유전자 가위를 실험할 수 있는 키트도 구입 가능할 정도로 바이오 실험 장비가 ‘민주화’되는 추세라는 게 김 이사의 설명이다. 바이오랩 서울은 이런 변화를 국내에서도 소개하자는 목적에서 설립됐다.
바이오랩 서울 같은 공공실험실은 폐쇄적이고 도제식으로 진행되는 생물학 실험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 김동현 이사는 “우리나라는 물론, 해외도 그렇지만 대학의 랩에 들어가 그 랩을 관장하는 교수가 선정한 주제의 실험만 해야 한다는 점이 생물학 실험의 가장 큰 문제”라면서 “철저히 소수만 통제된 상황에서 실험하고 자신만의 아이디어가 있어도 원하는 실험을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최근에는 대학이 재정난 등의 이유로 생물학 실험을 계속 축소하고 있고, 일부 대학의 경우 생물 실험에 참여하지 않아도 졸업장을 주기도 한다. 가격이 비싼 바이오 장비는 국내에서 몇 군데 갖추지 못하고 있는데 그쪽 장비가 있는 실험실의 교수와 사이가 좋지 않을 경우 실험할 기회조차 얻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실험실은 생물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생물학은 같은 ‘프로토콜(절차)’을 따라도 그 결과가 다를 정도로 손을 탄다. 표준화된 실험이 가능한 물리나 컴퓨터공학과 다르다. 생물학에서 실패와 성공을 통해 현장 노하우를 쌓을 수 있는 실험과 실습이 중요한 이유다. 이런 점에서 국내에서 아직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합성생물학 분야의 연구자들도 원하는 실험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공공실험실이 더 많이 생기길 바라고 있다.
고려대에서 합성생물학을 공부하는 여진기씨(25)는 DIY 바이오가 탈중심화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기대했다. 여씨는 “공공생물학 실험실은 일단 가장 기본적으로 실험 장소와 장비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이런 실험실이 많아지면 생물학에서도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있고, 출신이 아닌 실력에 따라서 인정받을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