앱도 게임도 아닙니다, 우린 ‘물건’을 만듭니다 – 조선일보

[요즘 벤처 젊은 창업자들 SW 탈피, 하드웨어로 이동]

이게 다 3D 프린터 덕분이다 – 싸고 빠른 3D 프린터 이용
머릿속 아이디어 뚝딱 만들어내… 시간 10분의 1로, 비용도 확 줄여

스타트업 혁명, 하드웨어로 – 시제품 제작에 몇천만원은 옛말
웨어러블 기기 등 빠르게 만들어… 투자 유치도 발품 대신 인터넷

 
지난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5층에 있는 ‘팹랩 서울’. 10여명의 사람이 PC 앞에 앉아 설계도를 보거나 삼삼오오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3D(입체)프린터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공간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PC 옆에 있던 3D프린터에서 붉은색 액체가 분사돼 나오면서 시제품의 모양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시각장애인용 웨어러블 기기를 만드는 스타트업 의 주재성 디자이너는 “머릿속에서 생각만 했던 하드웨어 시제품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어서 편하다”며 “개발 시간은 기존 제작 업체를 쓰는 것보다 10분의 1 이상, 비용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앱(응용 프로그램), 서비스 등 소프트웨어 중심이었던 스타트업(창업 초기 기업)이 최근 들어 하드웨어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3D프린터, 공개 소프트웨어 운동(오픈소스 프로젝트) 등이 확산되면서 소규모 업체도 충분히 하드웨어를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제조·생산은 대기업의 영역’이라는 상식이 깨지는 것이다.

저비용·단시간에 하드웨어 제조 가능

최근 하드웨어 분야의 신생 기업이 늘어나는 이유는 소프트웨어·서비스 시장이 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온라인·모바일 업계에서는 구글·유튜브·페이스북 같은 혁신적 서비스를 찾아보기 힘들고, 대부분 기존 서비스를 일부 개선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렇다 보니 게임 외에는 수익성이 크게 떨어지는 상황이다. 일본의 경우 앱(응용프로그램) 시장에서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개수로는 40%이지만 매출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세운전자상가에 있는 시제품 제작 공간 ‘팹랩서울’에서 스타트업(창업 초기 기업) ‘닷’의 디자이너 주재성(왼쪽)씨와 타이드인스티튜트 최아름 연구원이 3D프린터로 만든 스마트시계 부품을 살펴보고 있다.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세운전자상가에 있는 시제품 제작 공간 ‘팹랩서울’에서 스타트업(창업 초기 기업) ‘닷’의 디자이너 주재성(왼쪽)씨와 타이드인스티튜트 최아름 연구원이 3D프린터로 만든 스마트시계 부품을 살펴보고 있다. /이태경 기자

이런 상황에서 최근 3D프린터 확산에 힘입어 하드웨어 영역에서 신생 업체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3D프린터는 PC 프로그램에 설계도만 입력하면 마치 종이를 출력하는 것처럼 제품을 만들어주는 기계다. 이를 통해 시제품(프로토타입)을 손쉽게 만들 수 있다. 팹랩 서울 외에도 미래부·한국과학창의기술재단에서 운영하는 ‘무한상상실’ 등을 방문하면 재료비 정도만 내고 3D프린터를 쓸 수 있다.

구글의 스마트기기 운영체제(OS)인 안드로이드처럼 핵심 소프트웨어를 누구나 쓸 수 있도록 자유롭게 공개하는 오픈소스 프로젝트가 유행하는 추세도 여기에 힘을 더했다.

소프트웨어 외에도 특정 제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설계도·기판·자재명세서 등을 개방하는 사례도 생겨나고 있다. 이를 이용하면 창업자들이 백지상태에서 개발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기간·비용을 줄일 수 있다. 숙면을 도와주는 기기인 스마트 수면안대를 만드는 프라센의 장기숭 CTO(최고기술책임자)는 “과거에는 제품 개발, 시제품 제작 등에도 최소 수천만원의 비용이 들어 하드웨어 창업은 엄두도 못 냈지만 이제는 짧은 시간에 저비용으로 창업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온라인으로 투자금 모으기도 쉬워져

하드웨어 제조·생산의 핵심인 자본을 모을 길도 뚫리고 있다. 킥스타터·인디고고 같은 온라인 사이트에서는 수많은 하드웨어 스타트업이 3D프린터로 만든 시제품을 선보이고 투자금을 모으고 있다. 삼성전자가 인수한 미국의 사물인터넷 업체 스마트씽스, 웨어러블(착용형) 기기 업체 페블, 한국의 스마트밴드 제조업체 직토 등은 이런 서비스를 통해 투자금을 모아 사업을 확장한 케이스다.

애완동물용 웨어러블 기기를 만드는 펫피트의 김용현 대표는 “예전처럼 시제품을 들고 투자처를 여기저기 찾아다니지 않아도 된다”며 “최근 하드웨어 창업 생태계는 개발, 시제품 제작, 투자금 모집까지 가는 길이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편리해졌다”고 말했다. 미국의 쿼키 같은 회사는 100만명이 넘는 온라인 회원이 낸 아이디어 상품을 개발·판매해 수익을 나눠 가지기도 한다.

팹랩 서울을 운영하는 타이드 인스티튜트의 고산 대표는 “점점 기술 기반 창업의 벽이 낮아지고 있다”며 “앞으로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창업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시장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