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구석 ‘다시세운’ 세운상가 돌아보기
샛별 기자 승인 2018.01.30 11:20
[여행스케치=서울] 3층 정문 앞을 우람하게 지키고 있는 태권브이가 “안녕하세요? 저는 세봇입니다.”라며 인사를 건넨다. ‘세운’과 ‘로봇’의 합성어인 ‘세봇’은 상가 내 장인들과 청년들이 함께 3D 프린팅으로 만들어진 세운상가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마스코트다.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이자 국내 최초의 종합전자상가였던 세운상가에서 1970년대 ‘포니’가 탄생하고, TG삼보컴퓨터, 한글과컴퓨터, 코맥스도 모두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과거의 단편적인 추억들로 세운상가를 정의하는 건 섭섭하다. 세운상가의 기술과 역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수리계의 ‘어벤저스’, 장인들을 만나다
로봇을 만든 장인들은 추억도 수리해준다. 2층 동편에 새로 생긴 메이커스 큐브는 ‘수리수리협동조합’의 새로운 작업장이다. 추억과 사연이 있는 고장 난 전자제품을 수리해주는 특별한 공간으로 오랜 시간 세운 상가를 지켜온 여섯 명의 ‘수리장인’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김광웅 수리수리협동조합 대표이사는 30년 이상 되어야만 장인 인증서를 준다”며 “아주 까다롭더라고~”라고 장난스럽지만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장인들에 대해 소개한다. 실제로 일본 본사에서도 고치지 못했던 제품을 이곳에서 고쳐갔을 정도로 수리계의 ‘어벤저스’들이다.
마침 진공관 오디오를 고치고 있던 이승근 수리수리협동조합 대표이사가 보인다. 카세트 테이프에서 CD로, 이제는 MP3로 음악을 담는 매체가 바뀌는 와중에도 꾸준히 진공관을 찾는 이들이 궁금하다 묻자 그는 “소리가 다르다”고 말한다.
“빛으로 따지자면 백열등이 진공관 소리에 가깝고, 디지털은 형광등 같이 깔끔하고 맑은데 좀 날카로운게 깍쟁이 같다”란다. 50년이나 세운상가를 지켜왔다던 그에게선 자신이 수리하는 물건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난다.
9살 때 아빠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소니 워크맨, 돌아가신 아버지가 사용하던 피셔 엠프와 쿼런츠 턴테이블, 1990년 큰 마음 먹고 5개월치 월급을 주고 구입했던 첫 앰프, 1980년대 영국에 파견되어 근무할 때 고국 소식을 들려주던 단파수신기 겸용 라디오 등 물건들엔 쓸모 그 이상의 추억이 어려 있다.
이곳은 여섯 명의 조합원들이 교대로 상주하며, 안내도 해주고 수리 의뢰도 받는다. 무엇보다 이 공간이 반가운 까닭은 이들의 작업을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궁금해서 보고 싶어도 상가 내에선 혹여 방해될까 기웃거리다 돌아서는 이들이라면 유리로 되어 있는 이곳에 들러 장인들의 손놀림을 구경하기만 해도 시간이 훌쩍 지날 것이다. 간혹 빈티지 진공관을 이용한 청음회도 열리니 시간을 확인한 후 들려보자.
구석구석 재밌을 지도
‘다시세운’프로젝트는 세운상가뿐 아니라 총 7개의 상가를 모두 아우른다. 지금은 철거된 현대상가 뒤에 있던 세운상가부터 청계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 풍전호텔, 신성상가, 진양상가까지다.
세운~청계~대림상가 구간까지가 1단계, 그 뒤로는 2020년까지 도시재생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그러니 인포메이션센터에서 지도를 받아 둘러보는 것이 좋다.
‘아는 장인’에서는 장인들의 물건에 깃든 인터뷰를 들어볼 수 있다. 이곳의 재밌는 점은 모스부호를 스티커로 편지를 써볼 수 있다는 점. 또한 을지유람이나 연남투어 등 서울의 걸으며 즐길 수 있는 다른 여행정보도 얻을 수 있다.
장인들처럼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은 이들이라면 세운상가 5층에 자리한 ‘팹랩서울’과 지하보일러실을 개조해 만든 ‘세운 베이스먼트’, 아세안전자상가 3층의 ‘세운SEcloud’를 방문해보자.
특히 팹랩서울은 국내 최초의 팹랩으로 디지털 제작장비와 범용장비, 각종 공구를 구비하고 있는 제작 실험실이 있는 공공 디지털 제작소다.
남진혁 팹랩서울 연구원은 “팹랩서울에서는 장비들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며 “기본 공구나 납땜 등은 무료로 이용 가능하고, 디자인이나 개인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 역시 무료로 제공한다”고 설명한다.
‘세운SEcloud’에서는 블루투스 오디오 스피커를 만들어 보거나 3D 프린팅 등 다양한 교육 및 체험을 할 수 있다.
대림상가에는 청년 예술가들과 상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캐비닛 서울’은 사진매체를 중심으로 세운상가를 기록해놓은 작품을 24시간 감상할 수 있는 공간. 비어 있는 상가를 활용한 작은 공간은 10명의 작가들의 새작품이 항상 걸려 있다.
그 옆으로는 요즘 핫한 그린다방과 반대편엔 호랑이가 있다. ‘그린다방’은 1970~80년대 대림상가의 명물이었던 ‘그린다방’의 호칭을 그대로 가져온 경양식 식당이자 살롱. 내부 컨셉 역시 고전적인 느낌을 고수한다.
호랑이라떼와 반미로 무섭게 입소문을 타고 있는 ‘호랑이’는 빈티지스러운 멋을 전면에 내세운 인테리어와 라떼로 핫하다. 우유 특유의 비린맛 없이 생크림이 커스텀 되어 고소한 라떼맛이 특징이다.
물론 오래된 터줏대감도 놓칠 수 없다. “부산횟집 미역지리가 최고”라는 김광웅 대표를 비롯해 마늘을 잔뜩 넣고 팔팔 끓여 먹는 닭도리탕으로 유명한 계림은 세운상가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단골들의 사랑을 받는 맛집들이다.
종묘부터 청계천까지, 남다른 서울 뷰
‘다시세운’곳곳을 돌아보면 알겠지만, 내부는 여전하다. 세운상가는 김수근 건축가의 초안과 동떨어진 모양새가 되긴 했지만, 한국의 라데팡스로 불리는 당시 최고의 주상복합단지였다. 상층부 아파트는 한때 슬럼화 되었다 지금은 사무실로 임대되었고, 아래층의 상가들은 그대로다.
‘다시세운’프로젝트는 내부보다는 외부 조경을 바꾼 것. 가장 큰 핵심은 다시세운보행교. 세운상가부터 청계상가를 지나 대림상가까지 연결한 공중보행교와 종로에서 청계천, 을지로를 잇는 세운보행테크다. 청계천이 흐르는 풍경을 지나 이 길을 따라 걷기만 해도 남다른 서울 뷰를 관람하기 좋다.
종묘와 남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도심 속 전망대인 서울옥상은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다. 발전되지 않은 주변 상가와 고층 건물들이 나란히 보이는 진풍경을 자랑한다. 날이 풀리면 지난 가을 열렸던 것처럼, 다시 예술제와 영화제, 야시장 등이 열릴 예정이다.
1967년 지어진 세운상가는 2017년, 50년 만에 새 얼굴을 보였다. 한때는 세운상가에 가면 못 구하는 부품이 없고, 못 고치는 물건이 없다고 했지만, 세월은 먼지처럼 기계들 위로 내려앉았다. 위이이잉. 철컥. ‘다시세운’은 다시 시동을 걸었다.
그건 음원을 듣고, 영화 역시 다운로드를 받아보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여전히 비디오 테이프를 수리하고, 워크맨과 전축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멈춰 있던 물건들은 세운상가로 와 다시 생명을 얻는다. 어제도, 오늘도, 그래서 내일도 세운상가의 장인들은 이 자리에서 우리의 물건들을 만져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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