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4호윤하나 기자 ⁄ 2016.03.17 08:5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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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윤하나 기자) 이세돌과 인공지능(AI) 알파고의 바둑 대국을 지켜보며 도래할 미래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이가 있을까. 기계, 로봇이 진화해 이제는 인간을 넘어서리라는 인공지능까지 등장했다. 이런 시대에 미술이 종이와 붓, 물감과 흙을 대체하는 새로운 재료를 구하고, 세계관을 탑재하는 일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전통적이지 않은 재료와 매체를 활용하는 작가를 일컫는 말 중 ‘뉴미디어 작가’보다 더 적합한 단어를 아직까지는 찾기 힘들다. 새 매체에 접근을 시도하는 작가들은 많지만, 국내 미술계에는 아직까지 이들의 움직임을 흐름으로 엮어 설명하는 시대적 담론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다. 작가들 사이에서도 매체의 특성과 미래관에 관한 주제로 묶이는 일이 드물다. 기술을 활용하고 미래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말하는 이들 간의 네트워크가 아주 느슨한 현재 상황에서 이들이 자유롭게 만나 교류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가능성이 현재로선 가장 높은 곳으로 메이커 스페이스를 조명하는 이유다. 시리즈 지난 회에서 소개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아트팹랩에 이어 이번엔 한국의 팹랩의 시초인 팹랩서울(Fab Lab Seoul)을 소개한다.
지리적 이점과 상징성을 바탕으로 세운상가에 자리
60년대 후반 개장해 80년대 산업화 호황기를 누리던 제조업 기지, 세운상가가 재조명받고 있다. 지난 십여 년 간 침체기를 겪었지만 최근 세운상가 도심재생 사업, 즉 ‘다시. 세운 프로젝트’가 착공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세운상가와 주변 을지로 일대에 대해선 과거 “잠수함과 인공위성도 만들 수 있는 곳”이라는 근거 있는 풍문까지 있었다. 없는 것 빼고는 모두 구할 수 있는, 여러 부품-장비-도사님들이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은 곳이기 때문이다. 제조업의 미래를 실험하는 개방형 디지털 제작소, 팹랩서울(Fab Lab Seoul)이 세운상가에 자리한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2013년 문을 연 팹랩서울은 우주인 고산 씨가 대표로 있는 타이드 인스티튜트가 설립한 비영리 공공제작소다. 아이디어를 실제 작품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이곳은 공공도서관처럼 누구나 쉽게 찾아와 이용할 수 있는 제조 플랫폼을 표방한다. 처음 찾은 이들이 레이저 커터, 3D 프린터, CNC 라우터 등의 각종 디지털 장비를 사용할 수 있도록 매주 목요일 오픈 데이에서 무료 교육도 제공한다. 팹랩서울이 지난 4년간 세운상가에 터를 잡는 동안 많은 아티스트들이 세운상가와 인근 대림-청계상가에 입주했다. 작가가 운영하는 비영리 신생 공간(예술 창작·전시 공간)인 800/40, 300/20과 책방 200/20, 그리고 개인 작가들의 작업실까지, 세운상가의 제작 인프라와 팹랩의 만남을 통한 시너지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팹랩서울의 김동현 책임연구원이 설명한 2016년 계획에 따르면 △미얀마, 필리핀, 몽골 등 개발도상국에 팹랩을 설립하는 케이랩(K-lab) 사업 △청소년들에게 소프트웨어 코딩 및 피지컬 컴퓨팅(physical computing)을 교육하는 팹틴(Fab-teen) 사업 △다양한 문화가 융합되는 메이커 페스티벌(6월 중순)을 통해 메이커와 뮤지션의 만남을 추진하고 △도시와 달리 팹랩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도서산간 지역으로 장비 탑재 트럭이 찾아가는 팹트럭(Fab Truck) 사업 등이 운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무박2일간 마라톤 식으로 메이킹 하는 메이커톤(Maker-A-Thon)과 아프리카TV로 방송하는 발명쇼 팹너드(FabNerd) 등 흥미로운 활동이 진행 중이다.
특별한 공공제작소에서 뉴미디어 작가를 만나다
이지선 작가
“팹랩서울에서 워크숍 하며 작업도 함께”
팹랩서울에서 워크숍을 진행했던 이지선 작가를 만났다. 이지선은 사람과 시간, 장소, 물건 그리고 이야기를 연결지을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작가였다. 뉴욕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팹랩서울에서 건축가와 함께 진행한 프로젝션 매핑 워크숍을 시작으로 여러 아티스트를 초청해 함께 워크숍을 기획했다. 프로젝션 매핑은 3차원 건물이나 물체에 2차원 이미지를 투사하며 환영 효과를 얻는 기법이다.
작가는 이전까지 혼자 작업해오던 프로젝션 매핑 작업을 워크숍을 통해 처음으로 건축가와 협업했다. 레이저커터를 이용해 조형물을 만들고, 그 위에 매핑(이미지 투사)하는 워크숍을 운영했다. 이후 팹랩서울에서 레지던시를 한 이지선은 이후에도 색을 연구하는 작가와 함께 워크숍을 열거나 한국 건축가 박여림을 초대해 워크숍을 기획했다. 최근에는 2015년 12월 금천예술공장에서의 전시를 준비하며 팹랩서울을 찾는 등 이곳과 인연이 깊었다. 아마도 팹랩서울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뉴미디어 작가가 아닐까.
주변의 여러 뉴미디어 작가들을 초청해 그들의 워크숍을 기획하는 등 워크숍과 관련된 활동이 특히 눈에 띈다. 작가는 “이런 워크숍 기획·운영이 워크숍의 결과물보다 내 작업에 더 가깝다”고 설명했다.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작업 플랫폼을 제시하는 것, 그것이 작가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다.
그는 이어 “팹랩서울 같은 곳이 있어서 기술의 연마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작업을 할수록 기술 연마의 필요성을 절감한다는 그는, 아이디어가 기술을 만나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을 빠르게 돕고, 또한 비용도 적게 드는 팹랩서울 같은 도심 속 전자상가 내에 위치한 팹랩은 전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기술자를 위한 예술학교, 예술가를 위한 기술학교’라고 불리는 뉴욕대 IPT(Interactive Communication Programme) 과정을 마친 작가는 실제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예술학교의 창의적 기술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봤다고 전했다. 동기생들 중에는 교육의 결과물을 예술에만 한정짓지 않고 UX 디자인이나 창업 등 다양한 진로로 연결하는 경우도 있었다.
박소영 작가 겸 타이드 인스티튜트 연구원
“뉴미디어 아트의 저변 확대 원해”
박소영 작가는 팹랩서울에서 작업을 하다가 인연이 돼 이곳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로 전자회로 기판을 캔버스로 이용해 각종 부품을 부착해 이미지를 만든다. 박소영은 짧은 인터뷰 중 일본의 디자인 페스타에 참여한 경험을 전했다. 작품을 직접 출품하고 판매도 이뤄지는 페스타에서 이전에 경험못한 많은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형식의 박 작가 작품에 선뜻 관심을 표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문화적 스펙트럼이 넓은 편인 일본에선 그의 특별함에 대한 반응이 있었다는 게 그의 말. “뉴미디어 아트의 인프라가 아직까지 자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저변이 조금씩 확대되길 바란다”고 마음을 전했다.
팀 보이드의 송준봉, 배재혁 듀오
“시스템 오류로 보는 인공지능의 미래”
팀 보이드는 현재 금천예술공장에 입주해 활동하는 프로젝트 팀이다. 팀원인 배재혁, 송준봉 작가는 서울대학교에서 각각 기계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공학도다. 로봇 팔(쿠카·Kuka)을 이용해 공학적 움직임을 연극적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해왔다. 금천예술공장에서 만난 팀 보이드는 새로운 형태의 퍼포먼스 공연을 바삐 준비 중이었다. 공학을 전공한 이들이 생각하는 로봇은 단지 사람과 유사한 몸체를 가진 기계를 뜻하는 ‘휴머노이드’가 아니라 자율적 사고가 가능한 ‘인공지능’이다.
‘말펑션(malfunction)’은 팀 보이드가 지난해 패션 안경 브랜드 젠틀몬스터의 아트 프로젝트에 선보인 작품의 제목인 동시에, 이들이 주목하는 ‘시스템 오류(error)’이기도 하다. 팀보이드는 “에러는 인간에게 있어 일어나선 안 되는 시스템 내의 작동 오류지만, 기계 시스템 내에서는 시스템 자체가 개성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개성, 즉 개별적 유일함이 자연스러운 인공지능의 발전모습이라고 상상했다”고 설명했다. 말펑션은 두 대의 쿠카(로봇)로 구현되는 AI(인공지능)를 바라보는 팀 보이드의 세계관이 반영된 로봇 연극이다.
팀 보이드는 두 작가의 스튜디오 작업으로 운영된다. 스튜디오의 경제적 규모 상 커미션(금전적 지원)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뉴미디어 아트는 파손되면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기에 갤러리 공간에 전시되기 힘들고,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면에서도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하락되는 측면이 있다는 매체적 특성을 설명했다.
대부분의 전시가 작가에게 작가료(artist fee)를 지불하지 않는 현실에서, 특히 제작비가 많이 드는 뉴미디어 아트는 작가 스스로 작업을 지속하기도, 전시에 적극적으로 초대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 때문에 뉴미디어 아트가 아직까지 미술공간에서 활발하게 전시되지 않은 것일까.
원문 보기 :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17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