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료 싸고 재료 구하기 쉬워” 세운상가로 예술가들 몰린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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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속으로] 젊은 작가들의 새 둥지

중국산 등에 밀려 ‘이빨’ 빠진 상가
예술가들 작업공간 속속 들어차
홍대·문래동·성수동 거쳐 옮겨와

 

세운상가 5층 팹랩에선 만들지 못하는 물건이 없다. 서울 시내가 내다보이는 창가엔 그간 만든 물건들이 늘어서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오래된 건물이 내뿜는 분위기에 취재 시작부터 압도되는 듯했다. ‘OO전자’ ‘XX모타’ 등 낡은 간판들 사이에서 ‘도박 장비·비아그라·흥분제·DVD·CD’라고 적혀 있는 입간판을 봤을 땐 그냥 뛰쳐나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분주히 일하는 상인들에게는 말 한마디 붙이기가 어려웠다. 지난 8일 찾아간 세운상가의 첫인상이었다.

그렇게 미로 같은 상가 내부를 헤매다 ‘SPACE_BA421’이라고 적힌 점포를 발견했다. 세운상가는 한 층에서도 갈림길이 여럿이라 가·나·다·라·마·바열 등으로 개별 점포 주소를 나누는데 이곳은 바열 421호였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실평수가 3~4평 남짓 되는 공간에서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었다. 비디오 작업을 주로 하는 함혜경 작가의 개인전이었다.

청계상가 3층에 있는 책방 200/20과 작업실 ‘ㅋㅋㄹㅋㄷㅋ’이 세운상가 4층에서 하는 윈도 전시.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요즘 세운상가 곳곳에는 이런 공간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1968년 완공돼 한때 ‘우주선과 잠수함도 만들 수 있는 곳’이라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로 번영했던 세운상가는 값싼 중국산 전자제품, 온라인 쇼핑몰 등에 밀려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됐다. 최근엔 그렇게 하나 둘 빠져나간 ‘이빨’ 자리를 젊은 예술가들이 채워 가고 있다. 저렴한 임대료를 따라 홍대에서 문래동으로, 그리고 다시 성수동으로 옮겨 가던 발걸음이 근 1~2년 전부터 세운상가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페이스바 바로 옆에서는 작가 몇몇이 1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윈도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다열 434호에는 인터랙티브 아트와 그래픽디자인을 하는 ‘모인랩(moin lab)’ 이 지난 9월 입주했다. 5층에는 레이저 커터·3D프린터 등 을 갖춘 공공제작공간 ‘팹랩서울(Fab Lab Seoul)’이 자리 잡았다. 세운상가 바로 옆인 청계·대림상가에도 작가들의 작업실 겸 전시공간인 ‘800/40’ ‘을지로 하와이’, 독립출판물 전문 서점인 ‘200/20’ 등이 있다.

이틀 내내 세운상가 일대를 돌아봤다. 새롭게 생긴 공간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곳은 비영리단체 타이드인스티튜트의 고산 대표가 만든 팹랩서울이다. 3년 전 터를 잡은 팹랩서울은 198㎡(60평) 정도 되는 공간에서 사람들에게 3D프린터 등 기계 다루는 법을 가르치거나 작업 공간을 제공한다. 지난 9일 팹랩을 찾았을 때도 몇몇 젊은 작가들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온 팹랩 스태프인 에드는 직접 만든 스케이트 보드와 드론을 기자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기도 했다.

이곳에 입주한 작가들은 세운상가의 가장 큰 장점으로 임대료와 접근성을 꼽는다. 20~23㎡(6~7평) 정도 되는 공간이 보증금 200만원에 월 20만원 수준이다. 모인랩 오주영 대표는 “ 서울 중심에 있어 어디로든 이동하기가 편리하다”고 말했다. 재료를 상가 내에서 바로바로 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팹랩서울의 박수미 연구원은 “드론을 하나 만들려고 하면 납땜도 해야 하고 크고 작은 나사들은 물론 칩도 필요한데 이런 재료를 한군데서 구할 수 있는 건 세운상가밖에 없다”고 했다.

1968년 준공 당시 세운상가의 모습. 북쪽으로는 종묘가, 남쪽으로는 남산이 있다. [사진 국가기록원]

 

시대의 흥망성쇠를 모두 겪은 세운상가 특유의 분위기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기도 한다. 청계상가 7층에 있는 구수현 작가 작업실 창문에서는 청계상가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구 작가는 “이 쇠락한 공간 속에서도 생업을 위해 상인들은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간다”며 “그 분주한 에너지가 좋다”고 밝혔다. 내년 초 스페이스바에서 개인전을 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하석준 작가도 “강남은 매일 와도 어제 만든 것 같은 도시다. 하지만 세운상가는 과거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매력적인 곳이다”고 표현했다.

30년 넘게 세운상가에 자리 잡은 기존 상인들과 대부분 1~2년 차 남짓인 젊은 작가들은 이제 막 서로를 알아 가는 단계다. 28세 때 처음 이곳에 온 광진전자 김광웅 사장은 “전자하곤 관련 없는 젊은이들이 여기에 왔을 때 좋아하지 않는 상인이 많았다”며 “여전히 불편해하는 사람도 많지만 젊은 친구들이 수리를 맡기거나 부품을 사러 찾아오면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오주영 대표는 “처음엔 호기심 반 경계 반으로 바라보던 이웃 상인 분들이 요새는 ‘밥 안 먹느냐’며 과일을 나눠주기도 하고 이왕 온 거면 잘돼서 오래 있으라고 말씀해주시기도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세운·대림·청계상가 등을 포함한 세운상가군 일대를 보존해 문화와 관광을 연계한 도심 산업 거점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이곳 상인과 작가들은 상권이 유명해져 점포 소유주가 임대료를 올리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이 세운상가로까지 번질까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이틀간 세운상가를 다니면서 많은 수의 입주민이 이 같은 이유로 인터뷰를 거절하곤 했다. 책방 200/20을 운영하는 김진하 작가는 “서울시 사업에 젊은 예술가들이 도구가 되는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분이 많다”고 털어놨다. ‘세’상의 기‘운’을 모은다는 뜻의 세운(世運)상가는 새로운 변화와 함께 풀어야 할 과제 또한 건네고 있었다.

글=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상인들 ‘도시재생’으로 임대료 오를까 걱정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인 세운상가군은 원래 철거될 운명이었다. 그러다 서울시가 지난 2월 재개발이 아닌 ‘도시재생’으로 방향을 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공중보행교를 만들고 젊은 예술가들의 활동을 독려해 새로운 복합공간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내년 3월 착공에 들어가 2017년 공사를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입주민들은 이를 우려 섞인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30년 넘게 이곳에서 전자기기를 수리하고 있는 한 상인은 “ 상인들의 실질적인 생계에 도움은커녕 괜히 임대료만 오르진 않을까 걱정된다”고 호소했다.

이런 의구심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서울시는 거버넌스팀을 조직해 입주민들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있다. 서울시와 입주민 간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사단법인 공공네트워크 강원재 소장은 “상인 270명을 대상으로 초상화 인터뷰를 진행해 의견을 청취하고 8층에 소통방을 만들어 정기 회의와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시민들이 갖고 있는 추억의 전자제품들을 세운상가의 수리장인들이 고쳐주는 ‘수리수리얍’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서울시 측은 입주민들이 가장 우려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 대해 “소유주 가 일정 금액 이상 임대료를 올리지 않게끔 상생 협약을 맺도록 할 예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법적 효력이 없어 당사자들의 자발적인 협조가 전제돼야 한다.

원문 보기 : https://news.joins.com/article/19235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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