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 미사일도 만든다던 세운상가, 이젠 문화공작소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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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해 가던 한국 첫 주상복합
젊은 크리에이터들 모여들며 활기
임대료 싸고 필요한 재료 모두 갖춰
“숨어 있는 기술장인도 많아 윈윈”
‘짝퉁가구 메카’라던 을지로도
디자이너·작가 창작공간으로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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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는 최근 창작자들의 새로운 아지트가 되고 있다. 사진은 그곳에서 열렸던 크고 작은 전시들. ① 세운전자정원. [사진 서울문화재단]


낡은 건물, 후미진 골목, 불법 복제된 에로 비디오테이프…. 세운상가 하면 떠오르던 쇠락의 이미지는 잠시 잊어라. 지금 이곳에선 재미나고도 활력 넘치는 모종의 이벤트가 벌어지고 있다. 바로 서울문화재단 주최로 5층 실내광장에서 30일까지 열리는 ‘2016 서울상상력발전소-세운상가 그리고 메이커스’ 행사다. 메이커스란 3D프린터·오픈소스 등이 대중화되면서 전문적인 제품을 스스로 만드는 사람들. 한때 ‘미사일과 탱크도 만든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명성 높던 세운상가 터줏대감 장인과 21세기 메이커들이 작업한 결과물을 내놨는데, 주말 행사에서는 이를 시민들이 직접 만들어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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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세운상가 가열 324호 ‘빠빠빠 탐구소’ 정기 전시. [빠빠빠 탐구소]


전기·전자회로·레이저·로봇 제작 분야의 장인과 음악·조명·오락기·미디어아트 4팀이 협업한 물건들은 그야말로 독창적이다. 가령 백남준의 엔지니어였던 이정성(아트마스터) 장인과 미디어 아티스트 전유진이 협업한 ‘오디오 비주얼라이저’는 음악의 파장에 따라 투박한 아날로그 TV 화면이 바뀐다. 전자 분야 기술 장인 차광수(차산전력)·한영만(현성하이테크) 대표가 아티스트 유상준과 함께 만든 ‘DIY 악기 만들기’도 눈길을 끈다. 소리를 내는 인터페이스를 개성 있게 골라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신만의 디지털 악기로 변신시킨다. 한마디로 내공 깊은 기술 장인과 창의적 발상이 넘치는 신세대 작가들이 뭉친 셈인데, 대체 왜 세운상가가 무대였을까.

세운상가는 기실 하나의 건물이 아니다. 종로에서 퇴계로까지 1.8㎞에 이르는 세운·신성·대림·삼풍 4개의 건물군, 8개 건물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하지만 세운전자상가로 대표되며 세상 별의별 물건을 다 파는 전자제품의 메카로서 1970~8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68년에 준공한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이자 근대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80년대 들어서며 입지가 달라졌다. 을지로·종로 일대에 백화점이 들어서고 강남이 개발되면서 유동 인구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나마 유지되던 전자상가도 용산전자상가라는 경쟁자가 나타나면서 자리를 내줬다. 결국 90년대에는 복제 CD나 영화·게임 등을 구할 수 있는, 도심의 낡은 흉물 취급을 받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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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 30일까지 열리는 ‘2016 서울상상력발전소-세운상가 그리고 메이커스’ 조이스틱 체험부스. [다시세운 프로젝트 거버넌스]


이처럼 잊혀 가던 세운상가를 환기시킨 것은 다름 아닌 젊은 작가와 디자이너·건축가들이었다. 세운상가와 을지로 일대 작업실과 전시장을 무대로 활동하는 이들은 일련의 전시와 프로젝트를 선보이면서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물론 ‘왜 세운상가냐’는 물음에는 저렴한 임대료와 살아 있는 스토리텔링을 매력 포인트로 꼽을 수 있다. 더불어 을지로와 청계천에 이르는 주변 환경 역시 한 이유가 된다. 다양한 제조기반의 실용적인 인프라와 작업에 필요한 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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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팹랩서울’의 고산씨(왼쪽)와 그가 만든 3D프린터, ‘길종상가’의 박길종씨. [사진 디자인하우스]


2013년부터 세운상가 5층에 자리 잡은 ‘팹랩서울’ 역시 이러한 세운상가의 인프라에 주목했다. 우주인 예비후보로 유명했던 고산씨가 운영하는 이 작업실은 3D프린터를 갖춘 일종의 디지털 제작 공작소다. 그는 “예술가와 디자이너, 메이커 등처럼 하드웨어·기술이 부족한 스타트업 도전자들과 일이 별로 없는 기술 장인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조성해 서로에게 활력을 주면서 윈윈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난해 서울시가 발표한 세운상가 재생사업 역시 이곳을 다시 한번 주목하게 만들었다. 2017년 9월 서울시 주최로 처음 열리는 국제적인 규모의 서울도시건축 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은 배형민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는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세운상가 같은 곳은 없다”며 “오래전부터 경공업과 인쇄 등 도심 제조업이라는 생산적인 기능을 꾸준히 해 왔기 때문에 슬럼화됐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말한다. 도심 제조기반의 약화로 서서히 쇠퇴해 왔지만 젊은 크리에이터와 기존 기술 장인들이 서로 자극을 받고 교류한다면 새로운 도시 실험과 재생이 진행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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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길종상가 아티스트 3명이 꾸민 롯데 애비뉴엘 월드타워 에르메스 여름 쇼윈도. [에르메스]


‘세운상가의 재발견’은 이미 주변 을지로 골목으로 뻗쳐 있다. 대로변을 조금만 벗어나도 최근 작업실을 옮겼다는 디자이너와 작가들의 스튜디오를 만날 수 있다. 가구 디자이너 박길종(34)씨의 ‘길종상가’도 그중 하나다. 그의 이전 소식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다. 을지로 하면 떠오르는 불명예스러운 수식 중 하나가 ‘짝퉁 가구의 메카’라는 것인데 독창적인 가구와 다양한 오브젝트를 선보이는 것으로 이름난 그가 그 심장부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박씨는 “이사 전에도 목재와 금속 같은 재료를 구하기 위해 일주일에 3~4번씩 들렀던 곳”이라며 “재료 운송비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스튜디오를 옮겼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활력이 넘치는 을지로의 다양한 모습과 작업에 필요한 재료들을 자주 마주할 수 있는 환경도 영감을 준다”고 덧붙였다.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이면서 인쇄소를 겸하고 있는 ‘코우너스’도 을지로 인쇄골목으로 이사 온 지 1년이 지났다. 조효준(32) 대표는 인쇄 후가공업체 등이 5분 거리로 가깝고 재료를 구하기 쉬운 동대문과 방산시장 등에 빠르게 갈 수 있다는 것을 최대 장점으로 꼽는다. 최근에는 공동 작업실을 함께 쓸 파트너를 모집하는 광고를 종종 볼 수 있을 정도로 작업실을 옮기려는 사람도 늘고 있다. 그러나 건물 1~2층은 생각보다 임대료가 비싼 편이고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저렴하다는 게 그의 귀띔이다.

벌써 세운상가를 비롯해 을지로 일대를 두고 젠트리피케이션(임대료가 올라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토지와 건물주의 이해관계가 워낙 복잡해 쉽게 재개발이 일어나거나 핫스폿이 될거란 가능성은 낮다. 또 누군가는 생업을 위해 일하는 삶의 터전이라는 성격이 삼청동·이태원과도 차별된다.

배형민 교수는 “세운상가는 구도심 재생을 중심으로 부분적인 재개발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도심 제조기반이 매우 건강하게 형성돼 있는 곳이라 이 기능을 21세기형으로 바꾸기 위해서라면 약간의 젠트리피케이션은 오히려 익사이팅한 게임이 될 수도 있다”고 덧붙인다. 재개발로 인해 순간적인 지가 상승이 나타날 수 있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사회문화적 재생을 통해 활기를 되찾는 게 나아갈 방향이라는 이야기다.

현대화를 위한 질주 때문에 서울엔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이 드물다. 역사적인 스토리와 시대의 미감을 품은 오래된 건물을 동시대인들과 어울리는 라이프스타일 공간으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현재진행형이자 과거와 오늘, 그리고 새로운 미래까지 도모하고 있는 세운상가는 그 좋은 대안이 될 것이다.

전은경 월간 ‘디자인’ 편집장 dangdol@joongang.co.kr

원문 보기 : https://news.joins.com/article/20722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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